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쌌다. 전날 미리 볶아둔 토마토 소스로 부리또 세개를 만들고 계란 다섯개를 삶았다 (그러나 이때까지, 삼일동안 이것들로 연명하게 될줄은 몰랐다). 혼자 운전하면서 졸릴까봐 포도도 준비했고 (체리가 더이상 안 나오는 것이 아쉬울 따름). 이틀전부터 얼려둔 얼음을 채운 아이스박스에 과일과 물, 우유와 오렌지주스 등을 챙겼다.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처음인데, 짐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부담없이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챙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클럽에 갈때 차려입을 옷을 챙겨야 했는데, 뭐가 좋을지 몰라서 그냥 옷장에 있는 괜찮은 옷을 다 집어 넣었다. 그랬더니...
혼자 2박3일 하는 여행에 짐이 이렇게 많다. 옷가방 하나, 신발가방 (!) 하나 (패리스 힐튼이냐), 아이스박스 둘, 베낭 하나, 음식봉지까지. 하지만 차가 있으니 무슨 걱정이랴! 좋구나! 아침 7시 30분, 출발!
14번 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Avenue N이라는 길로 나가는 출구가 보였다. N? North인가? 그러다 좀더 가다보니 Avenue M이 나오더라. 설마... 이어 나오는 Avenue L, K, I, ... 이곳 Lanchester 사람들이 참 거리 이름 짓기 귀찮았나보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한편, 1st Street, 2nd Street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쉽게도 북쪽으로 가다보니 Avenue A에서 끝나서, 뒤쪽으로는 어디까지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운전하면서 사진을 찍는 위험한 짓을 했다. 그러면 안되는데... Avenue I.


Death Valley. 벌써부터 뜨거운 바람이 느껴진다. 이름부터 무서운 곳이다. '죽음의 계속'이라니.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름이 아닌가. 서부 골드러시 시대에 금을 찾던 사람들에 의해 데스밸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하나, 정작 이 시기에 알려진 죽음은 단 한 건이라고 한다. 그 이후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해마다 호기롭게 하이킹하던 사람들이 한둘씩 죽는 곳이다. 입구에서는 'Heat Kills'라는 경고 안내를 하고, 에어컨을 켠채 산을 오르다 자동차가 과열되지 않게 항상 주의해야 하는 곳이다. 외진 곳에서 차가 고장나면 정말 죽음만이 남는 곳이다. 며칠 뒤에 발견될 쯤이면 아마 뜨거운 태양과 바람이 고이 미라를 만들어주었을테니 시신을 수습하는데는 지장이 없으리라.
(바람이 불어 옷이 부푼 것일 뿐, 절대 배가 나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바위와함께 굴러 떨어지면 아마 인생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도 여러번은 지나갈만큼 오래 떨어질 것 같은 깊은 계곡. 저 멀리 보이는 산과의 사이에는 사막이 있다. '산'이나 '사막'이나 스케일이 큰 지형인데, 도대체 그런 것들이 여러개 한꺼번에 보이는 이곳은 도대체 얼마나 거대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 옆자리에서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준 아이스박스. 생수, 오렌지주스, 복숭아와 포도가 보인다. 아침에 바나나주스와 복숭아주스를 정성스럽게 만들어갔지만, 저녁에 먹으려고 열어보니 상태가 메롱해져서 둘 다 버려야 했다. 생과일주스는 바로 먹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Furnace Creek에 들러서 먹은 늦은 점심 도시락. 맛있는 닭고기 부리또!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맛있어! 한국형 부리또.
길의 초입부터 앞에 보이는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다.
데스밸리 여행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Badwater Basin. 나쁜물 웅덩이. 아유 귀여워. 사막한가운데 물이 고여있는 곳인데, 그것보다는 아메리카 대륙 (북남미를 통틀어) 가장 낮은 고도의 지역이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해발고도 -86미터로, 해수면보다도 낮은 곳이다. 이곳을 조사하던 사람이 여기 물을 보고 좋아했다가, 마실 수 없는 물임을 알고 삐져서 'badwater'라고 기록했다고 한다. 주변의 각종 염분이 누적되어 있어 마실 수 없는 물이지만, 각종 생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호텔로 12시쯤 돌아왔다. 아침일찍부터 도시락 싸고 힘든 경로로 12시간 넘게 운전해서 사실 많이 피곤했다. 라스베가스의 들뜬 기분이 마음의 피로를 느끼지 못하게 해주고 있었지만, 호텔에 돌아오자 마자 피곤함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미국 호텔에서 자는 일은지금까지 항상 출장때문이어서 맘편히 행동하거나 자고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싶을 때 일어날 수 없었다. 항상 긴장 상태. 그러나 마음편히 여행하는 곳에서는 호텔마저도 편하구나! 그렇게 여행 첫날, 데스밸리 여행과 라스베가스 입성을 마쳤다.

헐리우드를 지나 170번-5번-14번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갔다. 연휴의 시작이었지만 차는 거의 막히지 않았다. 그러나 바보같은 GPS를 믿지 않고 지도를 보면서 운전하는데, 혼자 운전하려니 힘이 들었다. 고속도로 달리다가 잠시 빠져나가서 지도 보고 다시 돌아가서 달리고... 혼자 운전하느라 한시간 정도는 지체된 것 같다.
1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멋진 풍경이 나와서 잠시 정차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이런 점에선 좋다. 맘에 드는 곳에서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것.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치만 외롭지). 지도를 찾아보니 Lake Palmdale이다.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1924년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인근지역에 물을 공급한다고 한다.


14번 길은 395번 길로 바뀌었고, 드디어 데스밸리 초입에 있는 Owens Lake에 도착했다. 이름은 호수이나, 말라버린 호수. 그러나 1924년까지는 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로정비 사업으로 강줄기를 돌리는 바람에 이 호수는 말라버렸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시기상으로 보아 아마도 Lake Palmdale의 형성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말라버린 호수. 차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고 다시 차에 타려는데,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집 앞에서 나던 채송화 냄새가 강하게 났다. 발밑을 보니 자갈 사이로 꽃운 피운 키작은 들꽃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데스밸리가 가까워 온다!

데스밸리 국립공원 들어가기 전부터 나를 압도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Father Crowley Point.

데스밸리 입구 입장료를 내는 Ranger Station에서 만난 커다란 까마귀.
입장료를 내고 나오니 'Elevation Sea Level'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데 해발고도 기준점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은 중요한 포인트이니 연출 사진을 빼놓을 수 없지. 세븐업을 달게 들이키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질질 흘리면서 먹는다. 드러워.


지나가다 만난 사구 (砂丘, sand dune).

멀지 않았지만, 더운 날씨에 도저히 갈 엄두가 안나고 무서워서 그낭 지나치려다 들어가는 사람이 있길래 용기를 내어 들어서 보았다. 마른 모래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러지는 모래들.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한 땅에서도 신기하게 자라는 초목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저 멀리는 정말로 생명이 살것 같지 않은 말 그대로 모래 언덕 뿐이었다. 오랜 운전에 지친 몸을 이끌고 거기까지 들어가볼 용기가 나지 않아, 모래밭을 밟아본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 나왔다.


Golden Canyon을 거쳐, Artists Drive에 들어갔다. 다양한 광물들이 산화되어 다양한 색깔을 나타내게 되어서 Artist's Palette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있는 길이다.


푸른색, 붉은색, 갈색이 정말 마치 팔레트에서 섞여 있는 듯 하다. '예술가의 팔레트'라. 유치하면서도 정말 센스 있는 작명센스가 아닐 수 없다. 곧 이어 있는 Devil's Golf Course는 한술 더 뜬다. '악마의 골프코스'라니! 우리나라엔 예를 들어 '비밀의 정원'이라는 '비원(秘苑)'도 그 뜻이 아름답지만, 한자어라서 풀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순우리말 이름이 아니면 풀이를 해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Devil's Golf Course는 그다지 끌리지 않아 그냥 지나쳤다.


데스밸리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Zabriskie Point. 말 그대로 '그림같은' 곳이다.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을 그려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Zabriskie Point에 올라 저 곳을 바라보면 원근감이 사라진다. 이러한 지형을 본 적이 없기에, 저 계곡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감이 없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거리를 짐작할만한 나무같은것도 전혀 없어 거리감을 상실하고 나면, 정말로 착시현상을 겪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데스밸리 여행을 마치고 국림공원 지역을 빠져나와 계속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도를 따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캘리포니아 경계를 넘어 네바다로 들어섰다! (경계를 넘을 때의 길 이름은 State Line Rd였다.) 안녕 네바다!

라스베가스가 가까워오면, 허허벌판을 달리다가 갑자기 눈 앞에 넓은 불빛이 나타나면서 어스름한 지평선을 밝은 선으로 분명히 그어준다. 그런데 정말로 '사막한가운데 도시가 뿅' 나타난다. 학교 운동장 한 복판에 수돗가가 있는 것 마냥 쌩뚱맞은 느낌이다. Las Vegas. 엔터테인먼트의 세계수도. 도박과 환락의 도시여, 그리고 죄악의 도시 (Sin City)여, 내가 왔다!
원래는 라스베가스에 5시 정도에 도착해서 호텔의 무료쇼를 관람하고 편히 TAO 클럽에 갈 예정이었는데,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8시반. 다른 건 놓쳐조 클럽은 놓칠 수 없지! 사실 클럽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락클럽에는 가본 적이 있지만, 나이트클럽은 한국에서도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그런데 라스베가스라고 하니, 왠지 용기를 내서라도 가야 할 것같았다. 그래서 옷이랑 신발도 있는대로 다 싸가지고 온 것 아니겠어? 그래서 체크인 후에 부랴부랴 씻고 나름대로 (...) 클럽 복장으로 준비했다. 검정 셔츠에, 고등학교 때 산 빽바지, 마이 뻬이보릿 검정 하이탑 컨버스. 컨버스? 그렇다! 클럽에 컨버스라니. 신발이 없었다. 그러나 별수 없지.
베네시안 호텔의 TAO 클럽에 갔다. TAO가 道 였다. 뭐랄까, 클럽이 도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헤비메탈 기도원 이런 느낌이잖아. 그런데, 아시안 클럽이라고 해서 갔더니 이게 뭐람! 죄다 서양애들이잖아! 한중일을 비롯한 아시아 사람들끼리 이역만리 라스베가스에서 친목을 도모하는 화기애애한 클럽을 기대했더니, 미국애들만 잔뜩 있다. 줄을 서서. 줄? 클럽에 들어가는데 줄을 서야 한단 말인가! 클럽을 들어갈 수는 있기는 한걸까 싶은 긴 줄이었다. 게다가 그 줄을 서서 혼자 오랜 시간 기다릴만한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남자끼리, 여자끼리, 남녀끼리 온 경우 모두 줄이 다른데, 남자끼리 간 경우는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클럽을 가지 못한 나는 그대로 카지노로 흘러들어갔다. 예전 호주 여행할 때 카지노에 한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라스베가스 카지노라서 괜히 그랬던 걸까. 전문 타짜라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저 구석에 커튼이 쳐 있는 'High Limit Salon'에서는 알수없는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라스베가스에 왔는데, 카지노를 즐기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지! 포커나 블랙잭처럼 플레이어의 실력이 반영되는 게임은 할 수 없었다. 즐겨보지도 못하고 잃을게 뻔한데다가, 판돈도 꽤 컸다 (최소 $15 정도였다). 슬롯머신도 엄청 많았지만, 가만히 앉아 쉴새없이 돌아가는 화면을 보고 재미를 느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른 것이 룰렛! 실제 판에서 하는 룰렛은 최소 $10 비딩을 해야 하지만, 화면으로 하는 룰렛은 $5면 된다. $50으로 들어갔다. 그냥 입장료라고 생각하고, 다 잃어도 후회없이 일어나리라 다짐하면서. 무조건 안전빵. 한판에 딱 $5씩만 걸면서, 한칸에 걸지 않고 두칸, 네칸에 거는 식으로 했다. 그렇게 했더니 크게 이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크게 잃지는 않아 꽤 오래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도박의 묘미는 위험 아니겠어? 네칸에 걸지 않고 두칸에 걸고, $1씩 걸지 않고 $2~3씩 걸기 시작했다. $25 정도까지 칩이 떨어졌다. 그런데 두판이 연속으로 팡팡 터지더니 $73이 되어버렸다. 망설일 것 없이 'Cash out'을 눌렀다. 만세! 큰 돈은 아니지만 룰렛으로 딴 $23에 수출역군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돈을 따가다니! (그러나 쓰고 간 돈이 훨씬 많잖아...) cashier에서 받은 돈 그대로 인증샷!

세줄요약:
도시락 싸들고 나와서 데스밸리를 여행했어요.
라스베가스에 와서는 클럽은 못가고 카지노에서 놀았어요.
피곤해 죽겠어요.




덧글
로이엔탈 2009/09/12 11:10 # 답글
Tao 클럽 좋아요. ㅋㅋㅋㅋ;;
세라프 2009/09/12 13:45 #
으하, 가보신 분들은 정말 다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꼭 가보고 싶었는데...어떤 면에서 좋나요? 클럽 평가엔 다양한 측면이 있을 것 같은데... ㅎㅎㅎ
다음번에 라스베가스 다시 가면 그땐 꼭 가보렵니다!!
로이엔탈 2009/09/12 14:03 #
술이랑 수질이요......... ( -_-);;..
세라프 2009/09/12 14:09 #
과연! 제가 들어가보진 못해서 술은 평가하지 못했지만, 수질은 과히 나쁘지 않아 보이던걸요.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만 해도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던데...
다음엔 술 평가하러 가봐야겠습니다. (수질 다시 평가하겠다는 건 아니고...)
飛烏 2009/09/14 08:56 # 삭제 답글
오오 라스베가스 오오나도 가고 싶다 ;ㅅ;
세라프 2009/09/14 12:56 #
오오 라스베가스 오오. 그거슨 진리.놀러 오렴. 오빠가 화끈하게 같이 놀아줄게.